배천조씨/문중 인물사

숙위공 조반의 역사적 발자취

조상엽 2024. 7. 14. 07:47

숙위공 조반의 역사적 발자취

조근환(대종회장)

  1. 머리말
  2. 숙위공의 성장과 청년기
  3. 환국과 조정에의 출사
  4. 시산조업전 탈취사건과 토지개혁의 시작
  5. 탁월한 외교가 숙위공
  6. 숙위공 쭈름
  7. 공신회맹(피도솔별) 참여
  8. 숙위공의 자녀들
  9. 숙위공의 발자취
  10. 맺는말

1. 머리말

고려 말과 조선조 초기에 국제정치의 격변기에 나라와 나라를 오가며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외교적 성과를 거두어 국가의 존망이 달린 사안마다 탁월한 외교가로서 수완을 발휘하고 업적을 쌓은 숙위공 조반에 대하여는 몇 차례 종보에 게재된 바 있었으나 시간이 흘러 다시 한 번 숙위공의 성품과 행적 및 역사적 발자취 등을 살펴본다.

선조나 종친의 업적이나 공적을 쓰는 일이 간단한 문제는 아니겠으나 기존의 역사적 사실과 각종 자료에 나타난 기록을 중심으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숙위공 조반은 서기 1341년(고려 충혜왕 2년) 황해도 연백군 해월면 운산리 시산동에서 아버지 세경과 문의양씨(찬성사 양백연의 딸) 사이에 누이 두 명과 함께 외아들로 태어났다.

조부 하는 이부상서 은천군이고 증조부 득주는 동지추밀원사 복홍군이며 8대조 문주는 병부상서를 지냈고 시조인 참지정사 지린은 공의 13대 조다.

많은 배천조씨 후손들은 어릴 때 성씨와 휘를 같이 부르면 조반이 되므로 아침식사 조반과 발음이 같아 어른들로부터 아침식사를 ‘조반'이라 부르지 말고 '아침진지' 등으로 달리 부르도록 교육받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는 숙위공이 조선의 개국공신으로서 우리 배천조씨 문 중에 많은 음덕으로 문중을 중흥시킨 분이시기도 하고 선조를 받들어 모시는 가문의 예절중요하게 여겨왔기 때문이다.

 

2. 숙위공의 성장과 청년기

공은 10세때 마을서당에서 한문을 배워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널리 알려졌으며, 12세(1352년, 공민왕 1년)에 아버지 세경을 따라 연경(지금의 중국 북경)에 유학을 가게 되는데 거기에 서 사촌매부인 단평장 집에 거주하면서 한문을 배우고 몽골어를 익히게 된다.

점차 소의 총명함과 출중한 실력이 주변에 알려지자 당시 나라 중서성 승상 탈탈의 눈에 띄어 그의 천거로 중서성에서 역리로 등용되어 요, 금, 송나라 3 개국의 역사서 번역 편찬 작업에 참여한다.

이는 나라가 중국 정통왕조의 하나라는 것을 밝히고 역사적, 이론적 바탕을 마련하기 위한 것 이었다.

 

3. 환국과 조정에의 출사

공이 나라 중서성에서 인정받고 국제감각을 체득하며 성장해 가고 있을 즈음 원나라는 순제(서기 1333~1367년)의 실정과 방탕으로 국운이 기울고 있었고 각 지방에서는 홍건적의 난 등으로 한족이 봉기하게 되었는데 이 세력들을 규합한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하게 된다. (서기 1368년)

한편 국내에 계신 소의 부모님도 연로하여 봉양해야할 때가 되었으므로 혼미한 원나라 말기의 정정 속에서 공은 17여 년간의 나라 생활을 마감하고 1368년(28세, 공민왕 17년)에 본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국내에 들어와서 공은 고려조정 밀직사에 출사하게 되는데 원나라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국정보필에 힘쓰니 고려 조정에서는 그에게 의지하는 바가 많았다.

조정에서 젊은 혈기와 정의감이 넘치는 숙위공은 폐쇄된 언로에도 불구하고 당시 정사에 막강한 권력으로 전횡을 부리는 요승 신돈을 참하고 정치의 부패를 혁신할 것을 공민왕에게 상소하였다. 이에 왕은 진노하여 오히려 공을 경기도 과천 관악산으로 유배 시켰다.(1368년)

공은 관악산 배소에 석단을 쌓고 청계산에 아침 해가 뜨면 종일토록 개경을 바라보며 왕을 사모하였다고 한다.

얼마 후 1371년 요승 신돈은 대신들의 탄핵으로 수원으로 추방되었고 뒤이어 주살 되었다.

공민왕도 말년에 실정(失政)을 거듭하다 1374년 9월 자제위(弟衛)에게 암살당하였고 이때 숙위공은 유배에서 풀리고 밀직사(密直司)로 복귀해 재등용되어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조반은 우왕 즉위 후에 정몽주(鄭夢周), 윤호(尹虎) 등과 함께 明나라에 사신으로 왕래하면서 우왕이 즉위한지 10년이 지나도록 받지 못했던 왕의 승습(承襲)과 선왕(先王)의 시호(諡號)를 내리게 하고 明나라의 지나친 간섭과 무리한 요구를 줄이게 하였다.

고려 말에 明나라에 몇 차례 사신으로 동행하는 등 조반과 연배가 비슷하고 친분이 두터웠던 포은 정몽주는 생전에 조반을 위한 시(詩)를 여러 수 썼는데 그 중 한 수가 포은집(제2집)에 기록하여 전해진다.

 

會趙相胖 조반 재상에게 드리는 시 -鄭夢周 정몽주 -

 

重陽佳節 菊花風

俯首沈吟 興不窮

可笑他心通未得

繩床枉費十年功

중양의 좋은 계절에 국화바람 불어오니

머리숙여 시를 읊자 그 흥취 무궁하네

우습도다 타심통을 아직 얻지 못한지라

승상에 앉아서 십년공부로 허비한 것이

 

  • 중양절 - 음력 9월 9일, 세시 명절중 하나 예부터 홀수를 양의 수라하여 9가 두 번 겹친다하여 중양절이라고 하였다.
  • 부수 - 머리를 숙임
  • 침음 - 속으로 깊이 생각함
  • 타심통 - 다른 사람이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을 꿰뚫어 보는 불가사의 한 힘(육신통의 하나)
  • 승상 - 노끈으로 얽어서 접었다 폈다 할 수 있게 만든 의자
  • 왕비 - 허비하다

 

4. 시산 조업전 탈취사건과 토지개혁의 시작

1)시산 : 황해도 연백군 운산리에 있는 산

2)조업전 : 조상 대대로 상속되어온 토지

태조 왕건이 건국한 고려초기에는 경자유전의 제도에 따라 백성들이 부지런히 농사짓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근검절약하는 기풍이 서고 나라의 비용도 절약함으로서 풍족하고 부강한 나라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고려 중엽 의종(1147~1171), 명종 이후로는 권신들이 국정을 마음대로 휘둘러 재물을 낭비하여 국가의 근본이 무너지고 국정이 혼란스러워지는데 더구나 원나라 간섭기인 서기 1270년경부터는 권신들의 주구와 온갖 명목의 징과로 호구가 날로 줄어들고 양민들의 생활은 더욱 피폐해졌다.

고려 말기에는 이인임을 필두로 임견미, 염흥방 등 권신들의 탐욕과 횡포가 극심해지면서 배천에서도 농민들의 밭 수백 경을 빼앗고 1년에도 두세번씩 수하는 등 횡포가 날로 심해졌는데 심지어 전직 고위관료였고 고향인 배천에 낙향해 있었던 조반의 시산동에 있는 조업전까지 탈취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공은 염흥방에게 사정하여 토지를 되찾았으나 얼마 후 또다시 염흥방의 수하인 이광이 공의 조업전을 탈취하였다. 공은 분개하여 당시 문하시중이던 조정의 최영에게 서한을 보내 가렴주구를 일삼는 임견미, 흥방 세력들을 제거해야 할 당위성을 역설하며 주상께 계달해 줄 것을 요청한 뒤 우선 염흥방의 수하이며 배천에서 횡포를 자행하고 있는 이광을 처단하 기 위하여 말 수십기와 병력으로 이광의 집을 포위하고 불살라 버렸다.

이에 염흥방이 분노하여 조반을 순군옥에 가두고 반란으로 몰아 문초하였으나 조반은 6~7명의 재상들이 재물을 탐내어 사방에 종을 놓아 남의 토지와 노비를 빼앗고 백성들을 해치고 학대하니 그들이 도적이 아닌가?" 라며 이광을 벤 것은 오직 나라를 돕고자 민적을 제거한 것인데 어찌 반란을 일으켰다고 하는가?" 라고 항변하며 무자비한 고문에도 굽히지 않았다.

이때 진상을 파악한 우왕이 최영, 이성계 등과 숙의한 뒤에 명을 내려 1388년 1월 8일 조반과 어머니, 아내 모두를 석방하고 권신, 염흥방, 임견미, 도길부 등을 감옥에 가두었다.

곧이어 전격적으로 권신들의 잔여 족당 50여 명과 잔당 1,000여 명을 처형하고 이들 권신들의 우두머리였던 좌시중 이인임을 성주로 유배시켰다. 후속 조치로는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고 여러 고을에 찰방을 보내 전답을 빼앗겼던 주인들에게 되돌려 주었다.

이어서 권력자들의 불법적인 토지침탈로 심화되는 재정위기와 노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권의 주도권을 쥐게 된 이성계 등 신흥세력에 의해 과전법이 시행되는 계기가 되고 고려 말 폐해가 많았던 사전제도를 개혁하는 단초가 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1388년 무진년에 발생해서 무진피화 또는 정월지주라 한다.

이 사건을 통해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 권신과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를 척결하기 위하여 당시 무관의 신분이었던 숙위공이 비분강개하여 파사현정의 기치를 든 것은 농민반란으로 발전할 수도 있었던 위기국면을 타개하고 조정에서 개혁조치를 취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고려 말의 권신정국은 급변하는데 최영이 문하시중에 이성계는 수문하 시중에 이색은 판사에 올라 고려조정의 새로운 중추세력으로 부상하면서 정국은 나라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5. 탁월한 외교가 숙위공

고려 말기의 국내정치는 권력층의 부패와 민심의 이반으로 왕권의 권위가 무너져가고 있었고 대륙에서는 쇠퇴해가던 나라와 신흥세력인 명나라가 서로 고려의 종주국임을 내세워 우월적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주도권 다툼을 벌였고 한반도의 지정학적 취약점이 상승작용을 함에 따라 고려는 생존을 위한 이원외교를 추구하였다. 이렇게 되니 조정은 친명파와 친원파로 나뉘어 국정이 난맥상을 겪게 되었는데 신흥세력인 이성계 일파는 무너져가는 나라를 지키기 위한 명분으 로 역성혁명을 일으켜 조선을 개국하기에 이른다. 지지기반이 다소 취약했던 이성계 등 신흥집권세력에게는 중원에서 이미 주도권을 장악한 명나라의 승인을 받는 일이 최대 관건이었다.

고려의 이원외교로 불신감이 컸던 명나라는 우왕과 창왕을 연이어 폐위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권좌에 오른 이성계 등 신흥세력에 대하여 불신과 함께 한편으로는 위협까지 느끼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수차례 사신을 보내서 조선개국에 대한 승인을 청하였으나 거절하였고 오히려 10만 여 군병을 동원해 문죄하려는 시도까지 있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위기감을 느끼게 되어 중국 물정에 통달하고 중국어와 외교적 수완이 뛰어난 조반을 주문사로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조반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불사이군이라는 유교의 도덕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 신흥집권세력을 멀리하며 고향 배천에 낙향하여 불도에 참선하며 은거하고 있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대신들을 배천으로 보내 조반에게 주문사의 책무를 맡아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게 되자 이성계가 직접 배천으로 찾아가게 됐는데 "공이 스스로 일신을 깨끗이 보존 하려는 뜻은 좋으나 우리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 위기에 처했으니 백성들을 어쩌겠는가?" 라며 수 차례 설득하여 마침내 공은 도덕적 가치관과 현실의 시대적 사명이 상충되는 역사적 상황에서 시대적 사명을 받아들여 나라에 주문사(특명전권대사)로 가게 된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이성계가 혁명을 일으키자 조선에 대한 불신이 커져서 조선에서 온 사신들 모두를 박대하였고 공도 마침내 처형될 위기에 처했으나 해박한 중국어로 용기 있게 변석하고 논리로 주달하며 지난날 나라에서 있었던 공과 주원장의 인연 등이 통하게 되어 마침내 태조 이성계의 개국승인과 '조선'을 국호로 비준 받고 돌아온다.

1392년 10월 22일 사신으로서의 사명을 완수한 숙위공이 돌아오니 태조께서는 백관을 거느리고 개성 선의문 밖까지 마중 나와 외국사신을 맞이하는 예에 따라 정중하고 성대하게 맞이 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친필교서(親筆敎書)를 내려 公을 극찬하였다.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구제하는데 보인 남다른 지략(智略)과 재주는 해(日)를 꿰뚫는 충성된 마음과 천운(天運)을 되돌릴 수 있는 지혜를 지녔고 강직(直)하고 용감(勇敢하니 능히 큰일을 맡길 수 있도다.

또한 박학(學)하여 고금(古)의 변화에 통달하였고

고상하니 장군(將軍)과 재상(宰相)의 재목이다.」

「卿以魅奇之略 經濟之材常懷貫日之忠實你愛

有回天之力剛 是以處大事勇足以決大疑

博通古今之變 雅合將相之材」

 

1394년에는 정안군 이방원(3대왕 태종)과 함께 공은 명 나라에 들어가 어보 인신을 내려달라는 표문을 올리고 돌아왔다. 이때 지중추원사 복흥군에 봉해졌다.

그 이후에도 숙위공은 성절사 또는 신년하정사 등으로 현안이 있을 때마다 중국을 왕래하며 탁월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6. 숙위공 졸기

공은 조선조에서 추중협찬 개국공신 복흥군에 봉해지고 정헌대부 참찬문화부사에 올랐는데 1401 년(태종 1년) 10월 27일 향리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61세였다.

조정에서는 조회를 파하고 제사와 부의를 내리고 시호를 숙위라 하였다. 조정에서는 공을 추모하여 공의 출생과 행장, 성품 및 자손 등을 조선왕조실록(대종실록 6년 10월 임오조)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 기술 중 공의 성품을 보면 「재치가 뛰어나 현명하고 도량이 넓다.

마음이 바르고 곧아 뜻을 얻지 못하면 맞서 대적하였다.

어버이와 임금을 잘 받들어 편안하게하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지조는 굽히지 아니하였다.

어려서부터 불도에 마음을 두어 시주와 적선을 기쁘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신·학자로 이름을 떨친 거유(巨儒) 권근(權近)도 시를 지어 애도(哀悼)했는데 양촌집(陽村集)에 기록하여 전한다.

 

弔詩

 

早宦黃元志氣雄

能因奮臂戢貪風

深謀克贊開邦運

專對偏留奉使功

晚透禪關三味述

會知世累萬航空

決然今日公何患

我自情鍾恨不窮

원(元)나라 벼슬 적에 지기(氣)가 커서,

분기(起)하여 탐풍(貪風)도 거둬들였다.

깊고 큰 지혜(知慧)는 개국(開國)을 돕고,

사신(使臣)으로 세운 공(功) 많기도 해라.

선가(禪)의 삼매술(三昧術)은 늦었지마는

세상일 헛것임은 일찍 알았네.

오늘에야 공(公)이야 무슨 근심 있으랴.

나만이 정한(恨)이 끝이 없구나.

 

陽村權近

 

공의 장지는 경기도 개풍군 북면 일삼소리 학서산에 정하고 술좌에 모셨으며 공의 부조묘 사우를 지어 조재궁이라 하였고 이곳 지명을 재리라 하여 개풍군의 명소가 되기도 했다.

공의 불천위대제는 매년 10월 상달에 배천조씨대종회관에서 거행되며 지난 2023년에는 622주기 제향을 올렸다.

숙위공이 돌아가시고 32년 후인 1433년(세종 25년) 공의 부인이신 정숙택주 계림이씨가 돌아가시니 나라에서는 호조에 명하여 부의와 장사에 쓸 석회 50석을 내렸다.

 

7. 공신회맹 참여

태조 이성계는 친필교지로서 공에게 개국공신의 작위를 내린데 이어 공의 후손에게는 대대로 관작을 주거나 모든 역을 면케 하였다.

이에 따라 공의 적장손은 매회 공신회맹에 참여하였다.

15세 서로, 16세 원립, 17세 권, 18세 장손, 19세 응두, 20세 중이 공신회맹에 참여하였고 21세 정구, 22세 석조, 23세 유(음성군), 24세 휘벽(은천군), 25세 태악은창군), 26세 일(은풍군)까지 14세 복흥군에 이어 26세에 이르기까지 공신회맹에 참여하거나 봉군작위를 받았다

이같은 사실은 조선왕조실록과 영조 5년(서기 1729년) 비변사의 상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 내용은 "태조 이성계 왕의 왕손도 9대로 끝나는데 어찌하여 조반의 적장손만 계속하여 은덕을 누리거나 참 작위를 받는가? 이를 바로잡고자 한다"는 비변사의 상소였다.

이에 영조대왕은 비답하여, "바로하되 반의 후손은 적정하게 우대하도록 조치"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5년) (1729년 5월 5일)

이는 태조께서 친필로 내리신 교지에 조반의 후손들은 "영세토록 사유를 받게 하라"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변사의 항소는 태조의 자손도 9대로 한정했는데 조반의 후손은 어떻게 대수에 한정이 없이 다 면제시켜줄 이치가 있단 말입니까?" •••조반의 자손은 적장손을 제외하고 사태"시켜 군역에 충정 시키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이어 전교하기를 조정에서 이미 대수를 한정했는데, 대수가 다한 뒤, 10대 후손이라 할 지라도 조금이나마 양반의 모양을 갖춘 경우에는 강제로 군역에 충정 시키지 말 것으로 신칙하는 것이 마땅하다."하였다.

 

8. 숙위공의 자녀들

공은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는데 삼형제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큰아들 서로는 지신사(도승지), 둘째아들 서강은 이조참판, 셋째아들 평숙공 서안은 지중 추원사를 지냈으며 세 아들 모두 세종 연간에 승정원의 승지를 역임하여 도합 16여년이 되는 기간에 걸쳐 봉직하며 세종의 치세를 돕는 역할을 하였다.

여계로 큰 따님은 검한성판윤 안경에게 출가하여 아들 6형제를 두었는데 5명은 문과에 1명은 무과에 급제하여 순흥안씨 명문가로 명성이 자자했고, 둘째 따님은 도승지를 지낸 유방경에게 출가하였고, 셋째 따님은 도승지 김소형에게 출가하여 아들 김유를 낳았고 김유의 아들인 손자 김핑필은 우의정을 지내고 동국 18현으로 문묘에 배향되었다.

숙위공의 장자 서로의 아들인 원수의 4녀는 성충달(김포현령)에 출가하였는데 아들은 성세순(대사헌, 형조참판)이고 증손자 성혼은 문신, 성리학자로서 문묘에 배향된 해 동 18현 중 한사람이다.

 

1)비답 : 조선시대 신하의 상소에 대해 국왕이 내린 답서

2)사태 : 조사해서 태거시키다.

3)충정 : 군역 따위에 인원을 보충하여 채움

4)신칙 : 단단히 타일러서 경계함

 

9. 숙위공의 발자취


야사에 기록된 숙위공 일화

조선경 방치 속위공의 국호주행에 일한 사화는 대동야승, 용재총화 등 야사와 속병사기 및 배천읍지에 실린 시산동 운교동의 지명전교 등 향토사화와 면암 회익현 선생이 지으신 숙위공 행장을 통하여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태조 이성계는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개국하고 명나라의 승인이 절박하여 10여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냈으나 그때마다 거절 당했대. 이에 태조 이성계는 배천 시산동에 은거중인 숙위공을 찾아 수 차례 설득하여 마침내 숙위공은 사신길에 나선다.

공이 국호주청사로 명나라 가는 도중 황해도 서흥 객사에 유숙할 때 꿈에 노승 3인이 나타나 퇴락해있던 오운사의 보수를 애걸하였다. 꿈에서 깨어난 공은 다음날 이를 심상지 않은 일로 생각하고 서흥군리에게 그 절의 내력을 들어 북쪽으로 일곱 마장 되는 그곳을 찾게 되었다, 그래 오운산 아래 이르러 상체의 불상을 발굴하고 관아로 돌아와 군리에게 오운사의 보수를 빨리 해도록 명하고 사신길을 떠났다.

 

1) 마장 : 거리의 단위, 오리나 십리가 못 되는 거리를 이를 때 '리' 대신 쓰인다

 

명나라에 도착하여 명나라 조정에 국호주청의 표문을 바치러 간 숙의공에게 명황제는 조선의 이씨 혁명을 꾸짖으며 공의 목을 치게 하였는데 이때 칼이 목에 닿자마자 쨍그렁하며 세 번에 절쳐 칼이 부러졌다.

이에 황제는 천명이라 하여 그치게 하였다.

공은 "한 말씀 드리고 죽기를 원합니다. 예부터 민심이 천심이라 하늘의 뜻에 따라 혁명을 하였음은 비단 우리나라 뿐만은 아닙니다" 하고 은연중에 명나라 황제를 빗대어 말했다. 공이 유창한 중국말을 쓰므로 황제가 "너는 어찌 중국말을 아느냐"고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신은 어려서 중국에서 자랐고 전에 원나라 탈탈의 군중에서 폐하를 뵌 일이 있습니다"고 말하니 활제가 당시의 일을 물었다.

이에 공이 자세히 말하니 황제가 용상에서 내려와 공의 손을 잡고 '만약 탈탈군이 그대로 있다면 짐이 오늘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니 경은 실로 짐의 친구다"하면서 빈객으로 대접하고 손바닥에 "조선"이라는 두 글자의 국호를 써주어 돌아왔다고 한다.

돌아오는 도중 다시 서흥 객사에 머무르는데 꿈에 머리 없는 스님 세분이 나타나 말하기를 "소승은 대감의 목을 대신하여 명황제에게 참수를 당했으니 대감께서 소승의 머리를 이어 달라"고 하면 시 그 방법을 알려 주었다.

공은 그 말에 따라 오운산 동쪽의 진흙으로 세 부처의 머리를 손수 붙여 주었다. 그 후 주민들이 말하기를 "숙위공의 목을 세 부처가 대신하고 공이 손수 세 부처의 목을 이어주었다" 하여 속명사로 개칭하여 부르게 되었다.

또한 공의 신도비가 세워져 국호주청의 사적이 기록되었으며 공의 영정각이 세워졌다. 이에 그 후손들은 시주를 아끼지 않았다.

또한 숙위공이 은거하던 향리의 시산동 근처에 속지명으로 구름다리라는 이름의 운교동이 있다.

태조 이성계가 공에게 국호주청사로 나서줄 것을 부탁하러 친히 임했다해서 그 마을을 이름이 군임이고 임금이 건넜다는 다리가 군임교이다.

군임교는 음운 변동에 의해 구름다리로 되었는데 이것이 이곳 지명의 유래다. 또한 임금이 물을 마셨다는 우물이 어수정이라 하며 현존한다.

공이 명나라에서 환국할 때의 일화를 대제학 성현이 용재총화에서 기록했는데 여기에는 공이 명나라에서 머무를 당시 사랑을 나누며 함께했던 여인이 있었는데 난세 속에서 함께 귀국하지 못하고 생이별을 할 수밖에 없었던 애절한 사연이 그려져 있다.

 

가정지

인천광역시 서구 가정동에 있는 조선 개국 공신 숙위공 조반의 별장지다. 한양에서 배천까지는 거리가 멀어 외가가 있던 이곳에 1395년(태조4년) 55세때 가정이라는 별장을 지었는데 경관이 뛰어났다.

숙위공이 타계한 뒤 둘째아들 서강이 관직을 떠나 이곳에 머물며 요양하였는데 세종이 여러 번에 걸쳐 다시 출사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응하지 않자 화공을 보내 그곳의 그림을 그려 바치게 했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가정이 한때 명사들의 시제에 자주 등장했는데 안평대군 이용은 그 시들을 모아 "석호가정별업도"라는 화첩을 만들어 부왕인 세종에게 바쳤다한다. 석호가정별업도는 조선후기 과거시험의 시제로도 선정될 만큼 유명세를 탔다.

가정터에는 현재 표지석이 있는데 뒷면에 이곳에서 만년을 보낸 조서강이 읊은 자음시가 새겨져 있다.

인천광역시 서구 가정동과 가정로라는 지명은 여기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전농동 부군당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전농동에는 세종 20년 (1438)경에 세워진 부군당이라는 사당이 있다. 이 사당에는 복흥군 숙위공을 부락수호신으로 모시고 580여 년간 매년 봄(음 3월15일)과 가을(음 9월15일)에 부락민이 제사를 지내면서 부군거리(당굿)을 하는데 그런 연유인지 지금까지 인근마을에 큰 재앙은 없었다고 한다.

부군당의 부지는 약 300평이고 맞배식 조선기와집과 수령이 500년 이상 된 물푸레나무가 수호신처럼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는 농악과 관련된 무신도 11점이 있는데 이는 이 지역 이 농사의 친경의식과 그 행렬 등으로 대변되는 왕실 농업문화의 중심지에 해당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곳을 부군당 또는 부강전이라 하는데 서울특별시에서는 이곳을 전통문화 유산으로 지정하고 있다. (서울시 민속문화재 제35호)

 

10. 맺는 말

숙위공은 고려 말의 문신으로서 불사이군의 도덕적 철학적 신념으로 인해 역성 혁명으로 개국한 조선의 정사에는 참여하지 않고 배천의 고향에 은둔해있었다.

그러나 공이 중국(원나라)에서 성장하며 학문을 익힌 운명적 자산으로 인해 당시 개국 초기 최대 현안인 명나라와의 외교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이 태조의 삼고초려가 공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다.

공은 조선의 개국 및 국호승인을 받고 돌아와 개국공신의 녹권을 받았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향리인 배천 시산으로 돌아가 불도에 참선함으로써 스스로를 달했다.

유학자이자 구한말 의병장 면암 최익현 (1834~1907)의 숙위공 휘 반 신도비명에는,

"장상과 원훈을 단호하게 버리고 배천 별서로 돌아가 칩거하며 부끄러워했으며 후손들에게도 유계로 간소하게 장례를 치르도록 하고 비석도 세우지 못하게 하였다”고 새겨져 있다.

유계에 따라 후손들은 장례 이후로 유지를 현각하는 것을 금지하다가 조선말에 이르러 "선조의 유훈이라고 핑계대어 선조의 평생 업적을 매몰시키는 것은 불가하니 돌에 새겨 기록하자"는 후손 및 종친들의 의견을 모아 정헌대부 면암 최익현 선생에게 부탁하여 비명을 만들어 숙위공 휘 반 신도비명을 세우게 된다.

면암 최익현은 이어,

"조반은 의에 처하여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 포은 정몽주와 야은 길재에 조금도 덜함이 없고 충절을 지킨 장상 아닌 장상으로서 일부에서 역성혁명에 직접 가담했던 배극렴이나 조준(조선개국공신) 등과 같은 사람으로 보는 것은 단편적이고 식견이 부족한 사람의 소견이다"라고 기록했다.

공은 조선조에서는 개국공신으로서 훈작을 받았으나 조정에는 출사하지 않았고 나라와의 주요 외교현안이 있을 때마다 주청사, 성절사, 신년하정사 등으로 외교 분야에서 활약했으며, 특히 불교의 선법에 심취하였으므로 권력이나 명예 등 세속적 가치관에서 벗어나 권력을 추구하지 않았다.

공의 세 아들 서로, 서강, 서안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세종대왕 치세에서 승정원 승지로 세 형제가 번갈아 도합 16여 년간 왕을 보필하여 57가 모두 조선 초기 나라의 기틀을 잡는데 이바지 하였다.

 

[출전 자료명]

  • 고려사 세가, 열전
  • 숙위공신도비명
  • 조선왕조실록(태조, 태종, 세종)
  • 숙위공 조반 사록(조언환)
  • 건원릉 지석문, 신도비명
  • 대동야승, 용재총화

배천조씨 종보 2024년 2월 통권 64호


01234567891011


속명사

五雲山(오운산) 續命寺(속명사) 창건 설화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五雲山(오운산) 續命寺(속명사) 창건 설화

五雲山(오운산) 續命寺(속명사) 창건 설화   위화도 회군으로 이씨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나라의...

blog.naver.com

미디어붓다 (mediabuddha.net)

 

미디어붓다:

 

www.mediabuddha.net

 


가정지

문화재-가정지 내용 | 인천광역시 서구 동주민센터>가정1동>우리동소개>동 주요시설>문화재 (seo.incheon.kr)

 

정치 에세이- 잊혀진 문화재 ‘가정지(佳亭址)’ - 인천일보 (incheonilbo.com)

 

정치 에세이- 잊혀진 문화재 ‘가정지(佳亭址)’ - 인천일보

올 초 언론은 천재 시인 이상의 집이 헐린다는 소식을 전한 바 있다. 이상의 집뿐만이 아니라 우이동에 있는 육당 최남선의 고가(古家)와 부암동에 있는 빙허 현진건의 옛집도 같은 운명에 처해

www.incheonilbo.com


전농동 부군당

전농동 부군당(典農洞 府君堂)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전농동 부군당(典農洞 府君堂)

전농동 부군당(典農洞 府君堂)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전농동 272번지에 있는 부군당. 당의 구조는 대지 199...

blog.naver.com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유산 전농동 부군당 무신도 (典農洞府君堂巫神圖) | 국가유산포털 | 국가유산 종목별 검색 (heritage.go.kr)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유산 전농동 부군당 무신도 (典農洞府君堂巫神圖) : 국가유산포털 - 문화재

국가유산 검색

www.heritage.go.kr

서울 전농동 부군당 무신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서울 전농동 부군당 무신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전농동 부군당 무신도(典農洞 府君堂 巫神圖)는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전농동에 있는 무신도이다. 2017년 4월 13일 서울특별시의 민속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되었다.[1] 지정 사유[편집] 조선시대 전

ko.wikipedi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