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천조씨/문중 인물사

배천조씨 문중의 여걸 조마리아 여사

조상엽 2024. 6. 18. 10:18

훌륭한 인물 뒤에 더 훌륭한 어머니

안중근 의사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조성녀(배천조씨 30세손  세례명 마리아) 여사는 1862년 4월 8일 황해도 해주군에서 배천조씨 선과 원주 원씨의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조마리아의 가문은 조선 선조 때 만경현령을 지낸 조복립, 효종 때 한성판윤에 오른 조관, 현종 대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은 조응건 등을 배출한 명문가였다.
조마리아의 오빠 조규증(1854~1911)과 사촌 오빠 조철증은 고종 때에 각각 행 수군절제사(정3품)와 충훈부도사 겸 선략장군(종4품)을 지냈다.
조마리아는 황해도 해주군 광석동에 사는 동 갑내기 안태훈(1862~1905)과 혼인하였다. 안태훈의 본관은 순흥으로 본래 해주부의 향리 가문이었으나 5대조 안기옥 이래 무과급제 자를 다수 배출하여 명망 있는 무반가문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조마리아의 남편 안태훈은 어려서부터 박은식과 함께 황해도 내 양대 신동으로 불렸다. 그는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하여 안 진사로 불렸으며, 개화파 박영효가 선발한 일본 유학생에 선발되기도 하였다. 평소 개신교나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1896년 가을 명동 성당을 찾아가 천주교에 귀의하였으며, 1897년 1월에는 형제, 아들, 조카들과 함께 빌렘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가운데 10개월 후에는 어머니, 아내, 누이동생들도 뮈텔 주교에게 세례를 받게 하였다. 이를 계기로 조마리아는 독실 한 천주교 신자로서 일생을 살아가게 되었다.
조마리아는 안태훈과의 사이에 안중근 (1879~1910), 안성녀(1881~1954), 안정근 (1884~1949), 안공근(1889~1939) 등 3남 1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이들은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그중 장남 안중근은 중국 하얼빈 역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히로부미를 처단 하였고, 차남 안정근은 북만주에 난립한 독립 군단을 통합시켜 청산리전투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삼남 안공근은 백범 김구의 한인애국단 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며 윤봉길과 이봉창의 항일 의거를 성사시켰고, 딸 안성녀는 안중근 의거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하여 손수 독립군의 군복을 만들었다. 이처럼 조 마리아는 자식들을 모두 독립운동의 제단에 바친 장한 어머니였다.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1905년 남편이 지병으로 임종을 맞이하자 조 마리아는 신천군 청계동에서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아들들을 따라 진남포로 이주하였다.
1906년 봄, 진남포로 돌아온 안중근은 동생들과 함께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기 위한 애국 계몽운동에 진력했다. 삼흥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에 매진하는 한편 천주교 학교인 돈의학교를 인수, 제2대 교장을 역임하면서 1907년 8 월 1일에 해외로 망명할 때까지 학교의 운영을 맡았다.
안중근은 삼흥학교와 돈의학교의 운영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고자 미곡상을 경영하는 한편 석탄 판매회사인 삼합의를 운영하였다. 그리고 일정 부분은 조부에게 물려받은 유산을 활용했는데, 이는 부친 안태훈 사후 집안의 어른이었던 조마리아의 허락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들들의 애국계몽운동을 보고 여성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한 조마리아는 1907년 아들 안중근과 함께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다. 대구에서 시작된 이 운동을 이끈 서상돈은 일본에서 빌린 국채 1,300만 원을 갚지 못하면 장차 나라를 잃을 것이라며 2천만 동포 모두가 참여하는 국채보상운동을 제창했다.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으로 퍼져가는 가운데 안중근은 자청하여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를 개설하고 지부장이 되었다. 그리고 1907년 2월 평양 명륜당에서 천여 명을 대상으로 국채 보상운동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연설을 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어 자신의 가족이 소지한 패물을 모두 국채보상금으로 내놓았고, 1907 년 5월에는 동생 정근과 공근도 형의 뜻을 받들어 삼흥학교 교원 및 학생들과 함께 34원의 국채보상 의연금을 납부하였다.
안중근이 국채보상운동에 매진하고 있을 때 모친 조마리아도 이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1907년 5월 조마리아는 '삼화항 패물폐지 부인회'의 제2차 의연 활동에서 은장도, 은가락지, 은귀걸이 등 20원 상당의 은 제품을 납부하였다. 이같은 정황은 일제의 한국 강점 이 전부터 조마리아 역시 국권 회복을 위해 미력이나마 자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들아,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라
1907년 7월 안중근은 독립운동을 위해 고국을 떠나고자 돈의학교 교장직을 사직하고 모친인 조마리아에게 작별을 고했다. 이때 조마리아는 아들에게 말했다.
"집안일은 생각지 말고 최후까지 남자답게 싸워라."
조마리아의 이러한 가르침은 안중근이 북만 주와 연해주에서 풍찬노숙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이 되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중국 하얼빈역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하였다. 안중근의 의거는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던 국내외 독립운동가는 물론 만청정부 타도 운동을 벌이던 중국의 혁명운동가들로부터 큰 찬사를 받았고, 더 나아가 일제의 한국 침략을 주시하던 서구 열강의 시선을 끌었다.
그러나 남겨진 안중근의 가족들은 일제의 혹독한 탄압에 직면해야 했다. 일제는 의거 직후부터 진남포에 소재한 안중근 가족의 거처는 물론 신천군 청계동의 안중근 친척들의 거처까지 수시로 수색하였다. 특히, 안중근의 동생들은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1909년 11월 7일 이전에 안정근과 안공근은 안중근 의거 관련 혐의로 일제에 체포되어 한달 넘게 옥고를 치렀다. 이들은 뤼순의 안중근을 면회하기 위해 12월 13일 인천에 당도했는데, 일제는 다시 이들을 수일간 구류하고 구타하였다.
조마리아는 평양으로 가 안병찬 변호사에게 아들의 변호를 요청했다. 이때 평양 헌병대와 경찰서는 헌병과 경관을 파송하여 조 마리아를 추궁하였다. 그러나 조마리아는 태연자약한 태도로 아들 안중근이 러일전쟁 당시 밤낮으로 국사를 근심하였고, 국채보상운동 당시 온 집안사람들에게 국채보상 의연금을 내게 하였고, 평소 가내 생활에서 매사에 정당주의를 모색했던 진실한 애국자라는 점을 강조하며 오히려 일제의 추궁을 반박하였다. 아울러 조 마리아는 1910년 2월 14일 일제가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하자 분노를 표했다.
"이토가 많은 한국인을 죽였으니, 이토 한 사람을 죽인 것이 무슨 죄냐, 일본재판소가 외국 의로 일제에 체포되어 한 달 넘게 옥고를 치렀인 변호사를 거절한 것은 무지의 극치이다."
조마리아는 이처럼 일제의 안중근 재판을 강하게 질타하였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아들을 면회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당차고 의로운 어머니였지만, 죽음을 앞둔 아들을 차마 만나볼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마리아는 뤼순 감옥으로 형을 면회하러 가는 아들들에게 마지막당부를 전했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게 목숨 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다른 마음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이 말을 들은 일본인들은 시모시자(그 어머니에 그 아들)라며 신문에 대서특필 하였다고 한다.
또한 안병찬 변호사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말도 전했다.
"네가 국가를 위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죽어도 오히려 영광이나 우리 모자가 현세에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조마리아는 안중근보다 보름 늦게 태어난 안중근의 사촌 동생 안명근에게 흰색 명주 수의를 보내 안중근이 이 옷을 입고 최후를 맞이하도록 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현장에서 체포된 안중근은 여섯 차례의 재판 끝에 이듬해 2월 14일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후 3월 일 여순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그의 나이 30세였다. 안 의사의 유해는 감옥 편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는데 현재에 이르기까지 유해 봉환은커녕 유해도 찾지 못했다. 그의 마지막 소원은 '조국 광복이 이루어지면 유해를 고국으로 옮겨 묻어달라'는 것이었는데 유언마저 지키지 못한 것이다.

동포들의 독립의식과 민족의식 고취에 힘써
1910년 5월 이후 조마리아는 안중근의 장녀이자 자신의 손녀딸 안현생을 명동성당 수녀원의 프랑스인 수녀에게 맡긴 뒤 자신은 아들을 따라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망명 이후 조마리아는 주변으로부터 '안중근의 모친'이라는 점에서 끊임없이 찬양과 주목을 받았으며, 동시에 위대한 독립운동가인 아들의 유지를 제대로 선양해야 한다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1910년 5월 조마리아는 정근, 공근의 가족과 함께 안중근의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로 이동했다. 조마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안중근의 유족은 그해 겨울을 크라스키노에서 보냈으며, 이 과정에서 연해주 한인들의 지원을 받았다. 안중근이 순국한 직후 조직된 안중근 유족 구제공동회가 모금한 기금이 크라스키노의 한인 지도자 최재형의 손을 거쳐 안중근 유족에게 전해진 것이다.
조마리아를 비롯한 안중근 유족은 도산 안창호의 도움으로 크라스키노를 거쳐 1911년 4월 동청철도 동부선상의 목릉(물린) 팔면통에 정착하였다. 이후 1914년 3월 조 마리아와 안중근 유족은 목릉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110km 떨어진 니콜리스크로 이주하여 잡화상을 운영하였다. 이 시기에도 조마리아는 쉬지 않고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신문》 1920년 1월 30일 자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져 있다.
"안중근 의사의 모친은 해외에 온 이래 거의 쉬는 날이 없이 동쪽으로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서쪽으로는 바이칼호수에 이르기까지 분주하여 동포를 각성시키는 사업에 종사하였다."
이는 조마리아가 러시아 동부 각지를 돌며 동포들의 독립의식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강연 활동과 방문 활동을 전개하였음을 보여준다.
조마리아는 러시아 동부를 순회할 때 깊은 밀림에서 산적이나 맹수를 만나도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지혜로운 술책과 담력으로 상황을 타개하여 동행한 남자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고 한다. 아래의 인용문은 조마리아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담대한 기상을 지니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만주에서 이사하느라 마차에 이삿짐을 잔뜩 싣고 가는데 마적들이 나타났어요. 총을 마구 쏘면서. 그러니까 같이 가던 청년들 수십 명이 전부 땅에 엎드려서 꼼짝을 못해요. 이때 안 중근의 어머님이 척 내려오더니 '이놈들아, 독립운동한다는 놈들이 이렇게 엎드리기만 할거냐? 이렇게 엎드려 있다간 다 죽어'라고 대갈 일성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벌벌 떠는 마부를 제치고 스스로 말고삐를 확 쥐더니 죽는 한이 있어도 가고 보자고 소리를 질렀다죠. '이랴'라고 소리 지르며 마차를 몰아 결국 무사했다는 것 아닙니까? 보통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조마리아는 이처럼 담대한 기상을 바탕으로 러시아 동부 각지를 순회하며 동포들의 민족의식과 독립의식 각성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여중군자, '여걸'로 불려
1919년 3• 1운동의 결과 국내외 각지에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중국 상하이에서도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아들들이 임정의 요인으로 활약하는 동안, 조 마리아는 니콜리스크에 머물렀다. 그녀는 1922 년 4월 니콜리스크에서 동포들의 환대를 받으며 회갑 잔치를 치렀으며, 이후 상해로 이주하여 다시금 아들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1924년 2월 안정근이 처자를 데리고 안창호를 따라 북경 근처 해전농장으로 이주하여 농장 개척을 통한 독립운동기지 건설 운동에 착수함에 따라 조마리아는 안정근, 안공근 가족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상해에서 조마리아는 자기보다 세 살 위인 백범 김구의 모친 곽낙원과 동기간처럼 지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아들 키우는 교육 방법이 아주 달랐다. 곽낙원은 아들이 조금이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가차 없이 매를 치는 등 엄격했으나 조마리아는 아들의 뜻을 최대한 존중하고 지원했다. 두 사람의 인연은 일찍이 189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안태훈은 동학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관군의 추격을 받던 김구와 그 부모를 자신의 거처인 청계동으로 초빙하여 보호해 주었는데, 이를 계기로 조마리아와 곽낙원이 친분을 쌓았고, 더불어 안중근 유족과 김구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안태훈은 아들 안중근 보다 김구가 3살 위로서 아들 또래였지만 김구에게 깍듯이 대했다고 한다. 이같은 배경에서 북경의 안정근이 1925년 이후 뇌병이 발생하여 독립운동 일선에서 물러나자, 안공근을 필두로 하는 상해의 안중근 유족이 김구의 최측근에서 임정의 독립 운동을 수행하는 중요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상해 거주 당시 조마리아는 동포들 간의 분란과 다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중재하는 해결사 역할을 하였다. 이때 이해 당사자들은 조 마리아의 타협안을 받아들이고 눈물을 흘리며 사과했다고 하는데 이는 조마리아가 안중근의 모친으로 평소 모범을 보인 가운데 독실한 천주교인으로서 공정한 자세를 견지했기 때문이었다.
상해에서 조마리아는 셋째 아들 공근에게 의지하였다. 동서양 언어에 능통한 안공근은 임정을 대표하여 프랑스조계 당국과 협상을 담당했을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그는 수년간 구미공사관에서 통역과 정탐원 생활을 하며 자신의 가족과 큰형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그러나 그의 수입은 11명 식구의 생계를 책임지기에 충분치 못하였다. 조마리아는 가정이 경제적으로 궁핍하였음에도 오히려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임정 후원 활동을 적극적 으로 추진하였다.
조마리아는 생전 '여중군자' 여걸'이라는 평을 들었을 정도로 신망이 높았다. 상해에서 조마리아와 함께 생활한 여성 독립운동가 정정화는 조마리아에 대해 "너그러우면서도 대의에 밝은 분이었다"라고 회고하였다. 이는 조마리아가 안중근 유족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김구의 모친 곽 낙원과 함께 상해 독립운동진영의 안주인이자 어머니의 역할을 수행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실로 조마리아는 한국 여성 독립운동가의 전범에 해당하는 인물이라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조마리아 여사는 1927년 7월 15일 상해에서 향년 66세로 별세 하였다. 사인은 위암이었다. 장례는 프랑스조계천주교당에서 상해 교민장으로 치렀고, 유해는 프랑스조계 민국공모의 월남 묘지에 안장하였다. 그러나 이후 도시개발로 묘지 터가 개발되고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무덤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대한 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조마리아 약력 -
• 1862년 4월 8일 줄생
• 1879년 안중근 출생
• 1896년 남편을 따라 가톨릭에 입교
• 1907년 안중근과 국채보상운동에 참여
• 1907년 5월 평안남도 삼화향 은금폐지부인회를 통해 국채보상의연금을 납입하는 등 항일구국운동
• 1910년 3월 안중근 의사 순국
• 1910년 5, 6월경 노령으로 망명
• 1920년 5월 가족과 상하이로 이주
• 1926년 7월 상해재류동로정부경제후원회 위원 역임
• 1926년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경제후원회 창립총회 정회원으로 선출
• 1927년 7월 15일 상해에서 향년 66세로 별세